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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돌보기

인생의 거지존

by 치유의 천사 2023. 4. 13.

 요즘 집앞 호수공원 달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 밤에 보는 풍경이 좋기도 하지만 특히 지난 주는 달리는 길에 벚꽃이 만개해서 참 아름다운 길을 달렸죠. 새하얀 벚꽃으로 이루어진 터널도 지나고 달리기를 마치고 천천히 걸으면서 보는, 호수에 비친 벚꽃과 조명들은 1000pcs 퍼즐을 맞춰 액자에 넣은 듯 예뻤습니다. 그리고 며칠을 못 뛰다가 오늘 다시 나가서 뛰었죠. 주말사이 세찬 비까지 와서 지난주에 보았던 벚꽃길은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지나가면서 본 나무들은 아직 벚꽃이 있던 꽃받침들이 붉게 남아 있어 마치 다 먹고 난 포도송이 같은 가지들이 붙어 있었고 옆으로 애매한 색과 크기의 잎들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통일감 없이 지저분 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지난 주 까지만 해도 그렇게 하얗고 예뻤는데 말입니다. 

 

 우리가 머리를 짧게 깎았다가 길렀을 때 한번 쯤 마주하게 되는 시기가 있습니다. 흔히들 '거지존'이라고 하는 짧지도 길지도 않아서 어떻게 해도 지저분하게만 보이는 구간입니다. 짧은 머리에서 긴머리로 가는 과정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이 거지존을 참아내지 못하고 다시 짧게 자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는 동안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시기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거지존은 내가 뭘 잘못해서 생기는 건 아닙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관리를 해도 그냥 그런 시기가 있는거니까요. 

 

 제 인생에도 그런 시기가 있었습니다. 수도원에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속세(?)로 나와 내과 레지던트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였죠. 정말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고, 신학와 의학 어느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애매한 상황이었습니다. 같이 졸업한 동기들은 벌써 요양병원 부원장이나 개원해서 전문의로 살아가고 있는데 저는 이제서 수도자라는 신분에서 의사라는 신분으로 다시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 되었으니까 말이죠. 수도회에서 나왔으니 수도자라 할 수 없고 의학공부를 놓은지 꽤 되었으니 의사라 하기도 애매한 시기였습니다. 정말로 제 인생의 제대로된 '거지존'이었죠.

 

 그런데 어찌어찌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3년차가 되니 아랫년차 선생님들한테 가르쳐주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도 하는 마치 의사와 같은 그 무언가가 되어 있기는 합니다. 정말로 바쁘게 사느라 그 거지존이 정신없이 지나갔던 것 같습니다. 병원생활을 다시 시작할 때의 애매함은 제가 뭘 잘못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동기들을 따라가려 공부도 했고, 교수님들과 윗년차 선생님들께 배우기도 많이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힘들고 애매한건 어쩔 수 없었죠. 그건 제가 무슨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런 시기였던 겁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변화의 순간을 만나게 됩니다. 새로운 직장을 구했거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때와 같은 순간들 말이죠. 그렇게 바뀌기 시작할 때의 내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만 합니다.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이 없어 보이고 뭘 해도 어색하기만 한 '거지존'의 머리를 보는 것 같이 말이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과정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그 애매함과 지저분함은 영원한 것이 아니에요. 더 성숙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가기 위한 과정일 뿐이죠. 그리고 그 애매함과 부족함은 나의 잘못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머리를 기를 때 그러하듯 '그냥 그런 때'일 뿐인 것이죠. 굳이 거기서 내가 노력하지 못한 부분을 끄집어내며 자책하지 마세요. 

 

 우리가 거지존을 벗어나기 위해서 뭘 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는 뭘 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지존을 어떻게든 약하게 지나가겠다고 머리를 만지며 계속 거울을 보면 뭘해도 다듬어지지 않는 머리에 자괴감만 자라나게 될 수 있어요. 차라리 그 시기는 머리에 대한 관심을 끈채 다른 일에 몰두하는 것이, 머리에 별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이죠. 병원에서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의사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는 제가 그랬듯이 말이죠.

 

 그러니까요, 삶의 전환점에 서있는 우리, 참으로 '거지존'에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너무 깊게 보면서 부족함을 발견하려하지 말아요. 나의 애매함에 대한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 하지 마세요. 그냥 그런 시기인겁니다. 내가 뭘 잘못한게 아니라 그냥 그런 시기인 것이죠. 그러니까 조금 애매하고 지저분해도 괜찮습니다. 벚꽃이 져도 다시 푸르른 잎으로 뒤덮이고, 거지존을 지나 원하는 헤어스타일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나도 모르는 새에 멋지게 바뀌어 있는 내가 되어 있을테니까 말이죠. 그러니까 다들 화이팅입니다. 흔히들 말하죠. '존버'가 답이라고. 어느정도 맞다고 생각해요. 어떤 경우 큰 노력을 하기 보다는 그냥 버티는 것이 답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지금 '인생의 거지존'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면 조금 지나 멋져질 자신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요? 자신을 탓하기 보다는 잘하고 있다고 나를 다독여 줄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참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화이팅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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